top of page

기업 자체가 하나님의 소유임을 인정하는 순간 나의 경영가치의 촛대는 옮겨진다. /Dejong Film, LLC 대표 종유석 감독




더종필름이 자리매김을 해가면서 종종 받게되는 질문들이 있다. "이제는 목회자보다는 이쪽 분야의 전문가로 활동하시는건가요?" "비즈니스 애즈 미션을 추구하시는 건가요?" "목회자가 아니라 감독으로써 계획하시는 비전은 무엇인가요?" (쓰다보니 무슨 유명인도 아니고, 마치 기자들이 질문하는 듯 오해받을 소지가 있는데, 그냥 아는 지인들이 묻는 질문이다.)

그럴때마다 나의 동일한 첫마디는 "아뇨 단순히 학비 벌기 위해 시작한 일이예요." "돈이 필요해서 시작했던 일이예요." "어떤 특별한 계획이나 비전에 대한 그림이 있는건 아니예요."

그렇다. 나는 목회자다. 사역자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소명으로 살아가는 예배자이다. 내가 하려는 말의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목회자는 까마귀가 물어다 주는 떡과 고기를 먹고 살아야 한다. 레위지파가 다른 지파들의 분깃을 받았던 것 처럼 그 의미는 하나님만이 기업이 되신다는 것을 뜻한다.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는 전적인 의존적 상태에 머물러야만 그 축복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목회자가 돈이 필요해서 일한다는 것은 어불성설 아닌가? 라고.. 나 스스로도 정의하기 어려운 혼란의 시기를 보냈었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처음엔 타협이 있었다. 주님.. 제가 지금 이 사례비로는 살 수가 없으니깐 제 힘으로 좀 일을 해보겠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일이 다운타운 자바시장에서의 도시락배달이다. 그렇게 시작했던 일이 우연한 인연으로 웨딩스튜디오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고, 우연한 기회로 "제이스토리필름" 이라는 웨딩프로덕션의 리더가 될 수 있었다. 뜻하지 않은 일로 그 회사를 나와 다시 광야에서 기대하지 못했던 좋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고, 그렇게 시간이 흘러 어느 순간 더종필름이라는 프로덕션이 세워졌다. 결과적으로 내가 계획하고 내가 이룬것은 없었다. 지나고 보니 그 우연한 기회들은 모두 하나님의 도우심이었고 은혜였다.

그러니 어찌 더종필름이란 비즈니스가 내 힘으로 일군 기업이라 할 수 있겠는가. 그렇기에 나에게 있어서 비즈니스란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는 열매를 낼 수 없는 사역의 개념과도 같다.

그러나 목회사역과는 확연히 다른 부분이 있다. 기업경영의 원칙을 세상이라는 상식의 기준에서 벗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다. 동시에 세상이라는 상식의 기준에 철저히 맞추는 것이다. 말 장난 같지만, 의외로 크리스천 기업들이 상식에도 못미치는 오만한 태도를 가지고 있는 경우를 보게 된다. 노동력 착취. 가족으로 똘똘뭉친 이사진. 탈세. 상도에 어긋난 행위... 자동차 뒤에 HE>I 또는 물고기스티커 붙이고서 칼치기 하는 사람들 보면...차라리 붙이지나 말지 하는 것 처럼 말이다.

그래서 나는 절대 비즈니스 애즈 미션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는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일한다는 뉘앙스를 결코 쉽게 뱉지 않는다. 그저 기업으로써 이익을 창출하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공정하게 분배하며, 사회로부터 받은 수익을 사회에 환원시키는 기업의 본질에 충실하려 할 뿐이다. 단지 이 터 위에믿지 않는 세상사람들로 더 많이 채워지기를 기다리고 그들을 기다릴 뿐이다.

그러면 대체 까마귀와 더종필름은 뭔 상관이 있다고??!! (라고.. 이쯤에서 질문이 나올만할터...)

내 뜻대로 이익을 창출할 수 없음을 깨닫는 순간부터 이 기업은 하나님의 것임을 고백하게 된다. 분명 이 기업으로부터 나의 생계는 유지되고 의존될 수 밖에 없지만 이 기업 자체가 하나님의 소유임을 인정하는 순간 나의 경영가치의 촛대는 옮겨진다. 그것을 단순히 수익창출에서 영혼구원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여전히 경영자는 수익구조를 유지하고 계발시키기 위해 혼신의 힘을 쏟아야 한다. 그러나 킹덤을 위한 데스크가 하나 더 생겼다고 표현한다면 공감이 가려나? 별개의 수익모형과 각각의 비즈니스모형이 한 회사에 공존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면 이해가 갈 수 있으려나. 골목식당의 백종원씨의 본업은 사실 쉐프가 아니라 CEO 이며 요리연구가라는 사실 처럼 말이다.

그래서 더종필름은 하나님으로부터 나를 이곳에 보내신 소명을 발견하는 장소가 된다. 교회에서는 전도사님이지만 학교에서는 학우가 되고 집에서는 희우아빠가 된다. 결코 내 아내에게 사모라고 부르지 않는다. 교회 안에서도 아내를 호칭할때 "아내"라고 호칭하며 아내역시 나를 부를때 우리 전도사님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하나님 앞에서 나의 정체성이 분명할때 사회에서 사장으로 불리우던, 교회에서 전도사로 불리우던, 아니면 도시락 배달하는 "어이!종씨!"로 불리우던 나는 소명을 따라 사는 예배자로 언제나 동일하게 설 수 있다.

"이중직목회자"라는 명칭은 그래서 어색한 것이다. 두 까마귀는 날라오는 장소가 달랐을 뿐이지 결국 그 까마귀가 그 까마귀인 것이다.

출처 : 종유석 Facebook


 
 
 

Comments


+81368211404

  • 페이스 북 사회 아이콘
  • 트위터 사회 아이콘
  • 인스 타 그램 사회 아이콘
  • 링크드 인 사회 아이콘

©2019 by LEADERZ.BIZ. Proudly created with Wix.com

bottom of page